2020ed, 2021ing

올해도 회고의 시간이 돌아왔다. 그래도 올해는 블로그에 글을 2개나 작성했고, 지금 잊지않고 한 해를 회고하는 글도 작성하고 있다.

여행

2020년은 여행으로 시작했다. 1월에 남미로 21일간, 대륙을 느끼기엔 짧았지만 회사원으로서는 꽤 긴 여행을 다녀왔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질 만큼 나라 간의 거리가 멀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앞으로 다시 한번 출국 심사장을 통과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지막 여행은 더 뜻깊었다.

여행지를 남미로 정한 이유는 오로지 Salar de Uyuni, 우유니 소금 사막 때문이었다. 이곳이 나에게 더 특별 이유는 "여기는 내가 꼭 가본다"라고 생각했던 버킷리스트였고, 어릴 적 꿈같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뭔가를 이루었다는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곳의 수많은 별들 만큼이나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이제 여행을 다녀온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곳에서의 느낌이 생생하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온 세상이 별과 구름으로 차오르는듯한 그 풍경은 앞으로도 평생 희미해지긴 어려울 것 같다

우유니 우유니의 밤

책을 읽는 것은 예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뭔가 잡히지 않아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회사 팀원 분의 방법을 오마주 해서 올해 하반기부터 "하루에 20페이지씩 책 읽기 챌린지"를 진행했다. 20페이지는 보통 15분 정도만 투자하면 될 정도의 적은 양인데, 이게 쌓이니 꽤 만족스럽다.

"조금씩 매일"은 나에게 꽤 잘 맞는 툴이라는 걸 알았다는 게 올해의 큰 수확이다. 그러고 보니 운동이던 공부던 책 읽기던 비슷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던 것 같다. "산 만한 목표를 세워야 언덕이라도 만들지"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작은 목표를 세우고 하루하루 쌓아가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딱히 장르는 가리지 않고 읽었는데, 아직까지 내용이 떠오르는 책이 있는 반면 저게 무슨 내용이었더라 하는 책도 있다.내년에도 꾸준히 진행하고 2021년 회고에 다시 한번 언급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래는 올해 읽은 책 목록이다.

  • 최고의 팀은 왜 기본에 충실한가 - 패트릭 렌시오니
  • 어린왕자 - 생텍쥐페리
  • 모든것의 처음 - 스튜어트 로스
  • 빅픽처 - 더글라스 케네디
  • 리팩토링 - 마틴 파울러
  • CODE - 찰스 펫졸드
  • 함께 자라기 - 김창준
  • 실용주의 프로그래머 - 앤드류 헌트 (읽는중)

책 목록

비대면

2020년은 코로나의 해였다. 이 키워드 하나로 몇 개월 만에 너무 많은 게 바뀌었다. 방역 여부가 장소를 고르는 기준이 되고,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게 눈치 보이는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과 사람이 더 멀어졌고, 마스크를 쓴 사람 보다 마스크를 벗은 사람이 더 수상한 사람인 시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와중에 나는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에 있어서는 그나마 안전할 수 있었다. 현재 회사는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화상보다는 면대 면이 가지는 장점을 더 크게 생각했기 때문에 코로나가 강제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회사에서는 원격근무에 대해 별다른 고민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있어서 코로나가 전화위복이었던 건,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조직 안에서 원격근무가 가지는 장단점을 느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환경에서 일하게 되든 간에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느낀 원격근무의 단점

  1. 커뮤니케이션이 비교적 잘 안 통함

비 개발직 군과의 커뮤니케이션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했지만, 개발자끼리 또한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님을 깨달았다.

  1. 텍스트라는 대화 수단에 대한 부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도 신경 써야 하고, 어조가 없다 보니 대화의 의도를 글에 모두 담아야 하기 때문에 텍스트는 말에 비해 에너지가 더 많이 쓰인다.

  1.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움

이것은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됐으면 좋겠는 때가 더러 있다. 회사에서는 원격근무 시간 동안 언제든 콜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룰을 세워두긴 했지만, 룰이 있다고 해서 콜이 비대면으로 말하는 것만큼 부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느낀 원격근무의 장점

  1. 체력을 아낄 수 있음

회사까지 편도로 1시간 정도 걸리는데, 2시간이면 24시간 중 꽤 긴 시간이다. 그리고 시간뿐만 아니라 만원전철에 탑승한다는 것만으로 쓰이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이렇게 출퇴근에 에너지가 아껴지니 자기개발이나 운동을 조금이라도 더 하게 된다.

  1. 조심스러운 커뮤니케이션

영속성이 있는 매체인 텍스트로 커뮤니케이션하다 보니 대화에 있어서 더 조심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뱉어버리고 후회하는 일이 말에 비해 적다.

  1. 기록

커뮤니케이션 한 내용들이 기록되다 보니 이전에 무슨 얘기 했는지 찾아볼 수 있다.

  1. 순수 업무의 밀도가 높음

사람들끼리 대면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이 얘기 저 얘기 하게 되는데 이런 잡담이 없다 보니 업무 자체에 쏟는 시간은 더 많아진다. 물론 이런 small talk이 없는 건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주 2회정도가 커뮤니케이션과 에너지절약의 중간점임을 느꼈다.

코로나 좀 없어져라..

회사

올해는 회사에 들어온 지 만으로 2년이 지나 3년으로 달려가는 해였다. 업무가 익숙해지는 와중에 내가 기대한 것만큼 회사가 성장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다 보니 회사 자체에 지루함을 느꼈다. 여전히 좋은 동료들과 감사한 환경이긴 했지만, 다른 환경도 경험해보는 것이 커리어에 있어서 좋지 않을까 싶었고, 다른 곳의 오퍼까지 받게 되었다. 그때 나를 잡아준 건 사실 내일채움공제 다. 이 사업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한 것 같다. (광고는 아니지만, 사회 초년생에게나 중소기업에게나 정말 좋은 사업이었다)

초여름 즈음에는 이직에 대한 생각이 특히 더 커졌는데, 원래는 그저 회사일이 지루할 뿐이었다면, 그때 진행했던 일들은 서비스 측면에서도 공감하기 힘들었고, 재미도 없었으며, 그렇다면 결과라도 좋길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했기에 더욱더 동기부여가 떨어졌었다. 또한 그 당시에 많은 팀원이 한꺼번에 이직을 하게 된 상황 속에서 평소에 동료가 최고의 복지라는 말을 밥 먹듯이 해왔던 회사의 태도나 대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몇 개월간 내일 채움의 만기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로부터 또 몇 개월이 지나 내일 채움이 만기 된 지금은 나의 변덕 때문인지 회사의 방향 선회 때문인지 몰라도 회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물론 다른 조직으로 절대 가고 싶지 않을 만큼 애사심이 생겼다든지는 전혀 아니지만, 회사에서 뭔가를 만드는 것 자체가 즐겁지 않았던 몇 개월 전과는 좀 다르다. 재밌는 업무들도 틈틈이 있고, 예전부터 하고 싶어 했던 디자인 시스템이나 모노레포, 스프린트, 테스트, 리팩토링 등의 시도도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요즘 회사의 방향이 customer centric 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한 경영진의 입장도 그렇고, 서비스 측면으로 봤을 때도 새로 합류한 크루들이 생각하는 프로덕트의 방향이 내가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것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물론 결정은 했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다. 결정했으니 "행동하는 단계"가 남아있다. 하지만 방향 자체에 공감하지 못했던 몇 개월 전과는 다르니, 시작이라도 해서 기대가 된다.

한편으로는 "내가 예전부터 그토록 말할 때는 뭐 하고..."라는 나쁜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하여금 보여줬어야 하는데 너무 말뿐이었던 게 아닌가, 너무 현실 탓만 하고 있지 않았나, 그리고 그마저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건 아닌가라는 반성도 많이 했다.

좋은 개발자

개발자라는 직업을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점차 "내 한 몸 굶어죽지는 않겠다" 정도의 궤도에 오르니 "나는 좋은 개발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내가 썩 나쁘지 않은 개발자라고 생각한다. 막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거나 비상한 머리로 혁신적인 코드를 창조해내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와 내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더 잘하기 위해 사유하고 반성한다. 수험생처럼 잠자는 시간 빼고 모든 시간을 공부에 쏟는 압도적인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발자로서, 사람으로서 한발 더 내딛기 위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어떤 조직이나 환경에 놓여도 어느 정도 내 할 일을 찾아 하고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썩 나쁘지 않은 개발자"라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어쩌면 expert beginner의 허세 혹은 자만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내가 더 겸손해지기 위한 자신감이며, 노력한 시간보다 노력할 시간이 훨씬 많은 지금의 나를 바라봄에 있어서 필요한 자존감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썩 나쁘지 않은 개발자"라는 자칭의 타이틀에 부끄럽지 않게 2021년에도 스스로와 약속을 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 애쓸 것이다.


2020년은 코로나가 전부일 줄 알았는데, 막상 되짚어보니 그 나름대로 한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은 한 해였다. 내년은 마지막 20대로서 어떤 한 해를 보내게 될지 기대된다.

기대